뒤이어 지하로 내려간 클레인은 십자로에 이르러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쯤 열린 철문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똑똑똑.

노크를 하자, 안쪽에서 나이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방은 아주 좁았다. 탁자 하나와 두 개의 의자만으로도 방 안이 거의 꽉 찰 지경이었다.


그 방의 안쪽에는 빈틈없이 닫힌 철문이 자리해 있었다. 탁자 뒤쪽에는 고전적인 양식의 검은색 옷을 입은 백발의 노인이 가스등 빛에 기대어 노랗게 바랜 책을 읽고 있었다.

잠시 후, 고개를 든 그가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쪽이 클레인 모레티인가? 방금 로잔느가 와서 말하길 굉장히 예의 바른 청년이라던데.”


“로잔느는 굉장히 친절한 사람이군요. 안녕하세요, 닐 선생님.”


클레인이 모자를 벗으며 예를 갖췄다.


“앉게.”


닐은 탁자 위 복잡한 꽃무늬가 새겨진 양철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손으로 간 커피 한 잔 마시겠나?”


그의 눈가와 입가에는 깊은 주름이 자리 잡고 있었고, 암적색의 눈동자는 나이가 든 탓인지 약간 탁한 빛을 띠고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커피를 드시지 않는 모양이네요?”


닐의 컵에 담긴 것이 맹물이라는 것을 눈치 빠르게 파악한 클레인이 물었다.


“하하, 습관이지. 오후 세 시 이후에는 커피를 마시지 않아.”


닐이 웃으며 말했다.


“왜죠?”


클레인이 물었다.


닐은 웃음을 머금은 채 클레인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잠을 설칠까봐 걱정돼서 그렇지. 그럼 알 수 없는 존재의 속삭임을 듣게 되거든.”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진 클레인이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닐 선생님, 제가 어떤 문헌을 보면 될까요?”


동시에 그는 던 스미스가 써준 ‘쪽지’를 꺼내 닐에게 건넸다.


“역사에 관련된 것, 복잡한 것, 혹은 불완전한 것. 솔직히 말해 난 줄곧 배워보려 애썼네만 아직도 초보적인 수준이야. 당대 사람들의 일기나 유행했던 책, 묘비명 등등을 알아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지.”


닐이 원망스럽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이것도 더욱 상세한 역사적 기록이 있어야만 구체적인 내용을 판단할 수 있네.”

“왜요?”


혼란스러워진 클레인이 물었다.

닐은 그의 앞에 놓인 누런 책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로셀 구스타프가 죽기 전에 잃어버린 일기라네. 비밀 유지를 위해 자신이 발명한 기이한 기호로 기록을 남겼더군.”


로셀 대제? 타임슬립 선배로 의심되는? 클레인은 흠칫 놀라며 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가 정말로 죽은 것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방법을 통해 신령이 되었다고 믿고 있지. 그래서 그를 신봉하는 이교도들은 아직도 기이한 의식을 진행하며 힘을 얻으려 하고 있어. 우리는 여태 그런 비슷한 사건들을 접하면서 그가 남긴 몇몇 기록의 원본과 사본을 손에 넣었다네.”


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여태까지 이 특수한 기호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한 이는 아무도 없어. 그래서 ‘성전’에서는 우리가 복사본을 가지고 연구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지. 그 결정이 뜻밖의 기쁜 소식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말이야.”


여기까지 말을 잇던 닐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난 개중 몇 개의 부호를 해독해냈고, 그것이 숫자를 의미하는 것임을 확인했다네. 봐봐, 이건 일기였어! 난 당시의 서로 다른 시기에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 특히나 황제 주위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해당 날짜의 일기를 비교해볼 생각이네. 그러면 더 많은 부호를 해독할 수 있겠지. 천재적인 생각 아닌가?”


백발이 성성하고 주름이 깊게 팬 노인은 반짝이는 눈으로 클레인을 바라보았다.


클레인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하, 자네도 보게, 내일부터 이 일을 도와줘야 할 테니.”


닐은 누렇게 바랜 책장 몇 장을 클레인에게로 밀어주었다.

그것을 똑바로 보기 위해 책장을 돌린 클레인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 ‘부호’들은 그것을 모르는 사람에 의해 베껴진 것이라 상당히 왜곡되고 약간 변형되긴 했지만, 자신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문자였기 때문이다.


순간 클레인은 자신이 이전에 살던 세상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착각을 느꼈다. 하지만 눈앞에는 여전히 황동 격자로 둘러싸인 고전적인 가스등과 양철로 만들어진 닐의 커피통이 놓여있었다.


타임슬립 선배인 로셀 대제가 중국인이었던 건가?

그래서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한문을 이용해 비밀스러운 기록을 남겼던 건가?


낯선 곳에서 만난 동향의 흔적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반가움’을 느낀 클레인은 얼른 손에 든 세 장의 글을 읽어 내려갔다.


11월 8일.

정말 신기한 일이다. 기상천외한 실험과 우연한 실수가 나로 하여금 폭풍에 시달리고 어둠 깊은 곳에서 길을 잃은 가련한 사람을 발견하게 했다.

그는 매달 보름달이 뜨는 날에만 현실 세계에 약간 가까워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크게 울부짖는 소리를 전송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이 시대의 주인공인 나를 만난 것은 그에게 큰 행운이다.


윗부분을 다 쓰고 나서 한 번 읽어보다가 탄식하고 말았다. 한자를 이용해 글을 남기긴 했지만, 어설픈 번역체로 쓴 것 같은 문장이다.

눈 깜짝할 사이 40년이 지나버렸다.


1184년 1월 1일.

성대한 신년 맞이 파티가 열렸다. 플로레나 부인은 실로 훌륭하다.


1월 2일.

내 외교관들은 전부 멍청이다!


1월 3일.

그 당시의 선택은 너무나 경솔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도제’나, ‘점술가’, ‘약탈자’를 고르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선택을 되돌릴 수는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1월 4일.

어째서 내 아이들은 다들 그렇게 멍청한 거지?

그 무당들에게 휘둘리지 말라고 1만 번은 더 말했는데. 아니, 그 무당들은 어쩌면 나까지 홀렸을지도 모른다.

마법약의 관건은 파악이 아니라 소화고, 발굴이 아니라 연기다.

마법약의 이름은 핵심적인 상징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이미지이며 소화의 ‘열쇠’다!


9월 22일.

모두가 연맹의 건립을 반대했다. 북쪽의 페이사크, 동쪽의 로엔부터 남쪽의 페네포트까지.

내 적들이 모두 모였지만 난 두렵지 않다.

난 그들에게 무기와 지식의 차이는 인구수와 저급한 랭크의 초월자들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려줄 것이다.

게다가 내 수하들은 그들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 잊은 모양이다.


9월 23일.

‘신이 버린 땅’을 찾던 배와 연락이 끊겼다.

무전기를 발명해야겠다. 그 배가 폭풍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9월 24일.

이타카가 플로레나보다 훨씬 매혹적이다.

어쩌면 난 그저 청춘을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원본을 손으로 모사한 사본이었기 때문에 글자의 크기가 훨씬 크게 확대되어 있어, 각 장에 담긴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심지어 보존과 연구를 위해 뒷장은 텅 비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인은 심장이 방망이질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나 마법약의 관건에 대해 진술한 부분을 봤을 때는 ‘문제 해결 방법’과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한 비밀을 알게 된 것 같다는 광기 어린 기쁨에 휩싸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게 앞으로 초월자가 되는 데에 길잡이의 역할을 해줄 수 있을지도 몰라!’


‘음, 이 세 장의 일기는 각각 다른 시기에 쓰였어. 로셀 대제는 매해 첫 번째 날에만 그 해의 연도를 적는 모양이군. 11월과 9월의 일기는 어느 해의 일기인지 판단할 수가 없겠어.’


‘그가 발견했다는 불쌍한 사람은 대체 누굴까?’


‘소화와 연기는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 거지?’


‘신이 버린 땅은 또 어딜까?’


온갖 의문들이 클레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는 당장이라도 로셀 대제의 일기 전체를 얻어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가고 싶었다.


* * *


“클레인?”


바로 이때, 맞은편에 앉아있던 닐이 넋이 나간 듯 생각에 잠겨있는 클레인의 이름을 불렀다.

클레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뒤통수를 긁으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제가 가장 뛰어난 능력을 드러내는 부분이 이거라고 생각하거든요. 해독을 좀 해보려고요.”


“젊군.”


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전에는 내가 그 부분에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고 생각했지.”


클레인은 손에 들린 세 장의 종이를 뒤적거리며 자신이 빼놓은 부분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그것들을 닐에게 되돌려주고는 짐짓 심드렁한 말투로 질문을 던졌다.


“지금 가지고 있는 건 그것뿐인가요?”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하는군?”


닐이 받아 든 종이를 매만지며 주름이 깊게 패도록 웃음을 지었다.


“초월자와 비밀이 연루된 사건은 원체 적다네. 휴, 우리 북쪽 대륙에서 신기한 존재들이 점차 죽어가고 있는 상황이 주된 원인이지. 그들 없이는 더 많은 마법약들을 만들어 낼 수 없고, 그러면 초월자들도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지. 흠, 지난 몇 백 년 동안 용, 거인, 그리고 요정은 책 속의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고, 바다족도 가까운 바다에서는 볼 수 없게 되었지.”


그 말을 듣고 순간 뭔가를 떠올린 클레인이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그럼 ‘용과 거인 보호 협회’를 만들 때가 된 것 같군요.”


클레인의 말에 닐은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듯 책상을 내리치며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 클레인, 자네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군. 우리 로엔 왕국의 전통이기도 하지. 젊은이가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는 건 좋은 일이야. 너무 협소하게 생각하지 말게나. 어째서 용과 거인만 보호할 수 있겠나? ‘신기한 동물 보호 협회’라고 불러야겠지.”


“아뇨, 아뇨, 그럼 식물들은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클레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덧붙였다.

순간 그와 닐은 서로를 마주 보며 동시에 외쳤다.


“신기한 생물 보호 협회!”


웃음을 터뜨린 두 사람 사이에는 방금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어색함이 눈에 띄게 줄어있었다.


“자네처럼 재미있는 젊은이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어⋯⋯.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 했더라?”


닐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초월자와 비밀에 연루된 사건은 아주 극소수라고 했지. 로셀 황제를 숭배하는 머저리들 역시 아주 적은 숫자에 불과하네. 이 세 장의 일기를 얻은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성과라네. 음, 다른 대교회당이나 교구에는 다른 일기가 존재할지도 모르겠지만⋯⋯.”


작게 몇 마디 중얼거리던 그는 클레인이 탁자에 내려놓았던 ‘쪽지’를 확인했다.


“권총? 소총? 아니면 증기총의 총알을 원하는 건가?”

“리볼버입니다.”


클레인이 답했다.


“좋아, 가져다주지. 아, 숄더 홀스터는 가지고 있나? 신사라면 공공장소에서 아랫도리가 불룩 튀어나오게 해서는 안 되는 법이잖나.”


닐은 남자라면 이해할 우스갯소리를 덧붙였다.


“아, 없습니다. 그걸 받는 데도 대장의 서명이 필요한가요?”


클레인은 웃음을 머금은 채 물었다.

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필요 없어. 기록만 해두면 되네. 홀스터는 보조 아이템이거든. 따라해 보게, 보조 아이템.”

“이전에 선생님이셨습니까?”


클레인이 웃으며 물었다.


“교회의 주일 학교와 수업료를 받지 않는 학교에서 일했던 적이 있지.”


닐은 쪽지를 팔랑거리며 서랍 안에서 꺼낸 열쇠로 방 안쪽의 철문을 열었다.


초월자와 일반인의 감각에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클레인은 소리 없이 중얼거린 뒤 탁자에 놓인 세 장의 일기를 내려다보았다.


‘로셀 대제는 분명 신비의 영역에 이르렀어. 그가 쓴 일기의 가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야.’


‘다른 사람들에게는 한낱 폐지로 여겨질지도 몰라. 언제쯤 이 글을 완벽하게 해독할 수 있을지 가늠할 수조차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나에게는 보물창고와도 같은 존재야!’


‘다른 일기는 어디에 있을지 모르겠지만, 더 많은 일기를 찾을 방법을 생각해봐야겠군.’

22화 타향에서 만난 고향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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