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마스터 1화



프롤로그



“아르마, 우리 사랑하는 아르마.”

어두운 도시의 뒷골목에서 밤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작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아직 어렸고, 다섯 살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아이에게 말했다.

“미안해, 아르마. 엄마가 약해서…… 널 끝까지 지켜 줄 수가 없어.”

여자는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칼에 베인 상처도 있었고, 불에 탄 듯 검게 데인 상처도 있었다. 그리고 확실한 건, 그녀의 몸에서 점점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지 마, 엄마. 가면 안 돼.”

겁에 질린 작은 아이는 그저 엄마의 따뜻한 품을 바랄 뿐이었다.

아이가 두 팔을 벌리자, 여자는 아이를 품에 꼭 안아 주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아르마. 하지만 너마저 죽게 할 수는 없단다. 곧 추적자가 엄마를 따라올 거야.”

여자는 주머니 속에서 작은 펜던트를 꺼내 아이의 목에 걸어 주었다. 그것은 은색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반으로 쪼개진 하트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 펜던트를 꼭 가지고 있으렴. 그리고 절대 잊으면 안 돼. 넌 자랑스러운 랜드올의 자손이라는걸. 우리는 ‘소리를 듣는 자’란다, 아르마. 우리는 소리를 듣는 자야. 읍…….”

여자는 고통스런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입가로 핏물이 새어 나왔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여자는 아이의 이마에 키스를 해 준 다음, 한 발 뒤로 물러나며 주문을 외웠다.

“하늘을 달리는 날개 달린 하얀 말의 정령이여, 우리의 오랜 맹약에 의거해 내 몸을 그대의 품에 맡기노니…….”

“엄마! 가지 마, 엄마!”

“안녕, 아르마. 부디 살아남아 주렴.”

여자는 슬픈 얼굴로 미소 지었다. 곧바로 하얀 기류가 여자의 몸을 감싸며 휘감아 올리기 시작했고, 세찬 바람과 함께 여자의 몸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엄마!”

아이는 여자가 사라진 장소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에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흑…… 흐윽…….”

아이는 그 자리에 웅크린 채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언제나 부드럽고 따뜻했던 엄마의 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난생처음 보는 도시의 뒷골목에서 아르마는 그렇게 혼자가 되고 말았다. 엄마는 부디 살아남아 달라고 말했지만, 아이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1장 시궁창의 아이들



상업 도시 엘드란.

이곳은 페독 왕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매일같이 대량의 물자와 화폐가 유통되는 지방의 상업 중심지였고, 지체 높은 귀족부터 최하층의 노예까지 공존하는 다양한 인종의 도가니였다.

그런 엘드란에서 노예보다도 더 낮은 위치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뒷골목의 버려진 아이들이었다.

노예는 적어도 주인에게 의식주를 제공 받는다. 하지만 버려진 아이들에게 주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보통 더러운 하천 다리 밑이나 하수구 안에서 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아이들을 ‘시궁창쥐’라고 불렀다.

“빨리해, 아르마! 사이클롭스 패거리가 오고 있어!”

골목 너머로 망을 보고 있던 검은 머리의 소년이 다급히 소리쳤다.

아르마는 음식점 뒷골목에 있는 거대한 쓰레기통을 손수레에 실어 옮기고 있었다.

“다 끝났어! 아지트까지 빨리 튀자!”

아르마가 손짓을 하며 손수레를 끌자, 망을 보던 루디가 재빨리 달려와 뒤에서 수레를 밀기 시작했다.

자정이 넘은 깊은 밤이었지만, 두 소년은 달빛에 의지해 상점가 뒤편에 떨어져 있는 개천의 아지트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위험했어. 사이클롭스가 코앞까지 왔었다고.”

루디의 말에 손수레를 끌고 있던 아르마가 혀를 내둘렀다.

“에휴, 그놈들…… 이제 쓰레기통은 뒤지지도 않으면서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아르마는 일단 그렇게 말하며 손수레를 계속 끌었다.

엘드란의 버려진 아이들 중에도 나름대로의 서열이 있었는데, 사이클롭스는 그중에서 가장 힘이 센 15살짜리 소년과 녀석의 그룹을 지칭하는 말이다.

아르마의 친구들이 시궁창쥐 중에서 평민이라면, 사이클롭스 녀석들은 귀족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아르마! 루디! 무사히 왔구나!”

두 사람이 개천의 다리 밑의 아지트로 돌아오자, 아지트를 지키고 있던 빨간 머리의 쌍둥이가 반갑게 맞이했다.

아르마는 쌍둥이를 향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린디스! 란디스! 별일 없었지?”

“별일은. 아, 저번 주에 여기 온 신입 알지? 그 애가 사이클롭스 패거리한테 얻어맞고 다니더라고. 에잇, 이쪽으로 데려오려고 했는데 실패했어.

쌍둥이 중에 언니인 린디스가 주먹을 쥐어 보이며 말하자, 아르마는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알트린 신전에 버려졌던 여덟 살짜리 말이야?”

“응. 그 애 부모도 멍청한 거지. 알트린 신전은 버려진 아이를 거두지 않는데 말이야.”

“기왕 버릴 거면 플라티스 신전에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쪽은 잘하면 받아 줬을 수도 있잖아?”

린디스와 란디스가 번갈아 가며 대답했다.

아르마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트린은 운명의 신으로, 그쪽의 신관들은 절대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버려진 아이들이 굶어 죽는 것조차 모두 신이 정해 준 운명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반면 플라티스는 빛과 자애의 신으로, 그쪽 신을 모시는 신관들은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거나 무상으로 음식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 다만 플라티스 신전에서 무상으로 베푸는 급식을 사이클롭스 패거리가 독점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아르마는 루디와 함께 수레에 가져온 쓰레기통을 내려놓은 다음, 바닥에 돗자리를 깔아 놓고 내용물을 쏟아부었다. 음식 찌꺼기, 야채의 꼭지나 과일 껍질, 곰팡이 핀 빵 등 다양한 쓰레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히히, 오늘은 풍년인데? 배 좀 채울 수 있겠다.”

루디가 웃으며 말했고 아르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마가 다섯 살에 처음으로 쓰레기통을 뒤졌을 때는 이런 것들을 먹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하지만 그 뒤로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열두 살이 된 지금은 마치 테이블에 가득 차려진 진수성찬을 보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지난 7년 동안 아르마는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뒷골목에 적응했다. 쓰레기통을 뒤지고 구걸을 하고, 좀 더 나이 많은 아이들의 패거리에 끼기도 하며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아르마가 처음 들어간 것은 ‘나이프맨’이라 불리는 열네 살짜리 소년이 대장으로 있는 패거리였다. 나이프맨은 숙련된 소매치기로, 상점가나 번화가를 돌며 사람들의 지갑이나 물건을 훔치는 것으로 패거리를 이끌었다.

아르마는 남의 것을 훔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어렸을 때는 그런 패거리에 껴서라도 살아남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열 살 때까지 나이프맨의 패거리에 있었고, 거기서 루디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루디는 아르마와 동갑으로, 나이프맨에게 직접 소매치기 기술을 배운 손재주가 좋은 아이였다.

하지만 나이프맨의 패거리는 아르마가 열 살 때 해체되고 말았다. 소매치기를 하던 나이프맨이 치안관에게 걸려 길거리에서 맞아 죽었기 때문이다.

나이프맨의 패거리는 도시 외곽의 버려진 건물에 모여 살고 있었다. 다행히 소매치기를 나간 루디가 일찍 눈치채는 바람에, 아르마는 치안 단속반이 몰려오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건물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때의 단속으로 30명이 넘는 버려진 아이들이 처참하게 맞아 죽었다.

시궁창쥐에겐 인권이라는 게 없었다. 엘드란 시에 있어서 이 아이들은 박멸해야 할 해충 같은 귀찮은 존재였다.

“황금호박 식당의 주방장 실력이 날로 좋아지는 것 같아. 이것 봐, 사과 껍질을 이렇게 얇게 깎다니. 양심도 없지.”

린디스가 얇은 사과 껍질을 동생과 나눠 먹으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란디스가 능숙한 솜씨로 빵에 피어난 곰팡이를 털어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우리가 매일같이 쓰레기통도 닦아 주는데, 가끔은 깨끗한 과일 한두 개 정도는 인심 좋게 넣어 줘도 좋잖아? 아무튼 가진 놈들이 더하다니까?”

린디스와 란디스는 아르마보다 한살 위인 열세 살의 쌍둥이로, 겉으로 봐서는 누가 누군지 쉽게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이 생긴 자매였다.

아르마는 눈썰미가 좋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이 쌍둥이를 구분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1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웃을 때 눈을 가늘게 뜨며 새침한 표정을 짓는 게 린디스고, 긴장하면 습관적으로 손톱을 깨무는 것이 란디스다.

쌍둥이의 외모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물감을 풀어 놓은 것처럼 새빨간 머리카락인데, 머리카락이라고 하면 아르마의 금발이 훨씬 눈에 띄었다.

대륙의 동부에 위치한 페독 왕국에서 금색의 머리카락 자체가 매우 희귀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네 명의 소년, 소녀가 안정적으로 시궁창쥐로서의 생활을 버티고 있는 이유는, 바로 새롭게 시작한 쓰레기통 수거 전략 때문이었다.

1년 전 아르마가 처음으로 떠올린 이 전략은, 지금까지처럼 음식점 뒷골목의 쓰레기통을 뒤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들개처럼 쓰레기통을 뒤지고 주위를 더럽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년 전만 해도 상점가의 음식점들은 쓰레기통을 뒤지는 시궁창쥐들을 내쫓기 위해 따로 경비까지 세워 놓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르마는 쓰레기통을 마구 어지럽히는 대신, 오히려 내용물을 비우고 깨끗이 청소까지 해서 다시 가져다 놓는 방법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약간의 트러블도 있었지만, 공짜로 쓰레기통을 비워 주고 물청소까지 해 주는 것을 음식점 주인들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 후 아이들은 안정적으로 식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모습을 본 다른 다리 밑에 사는 많은 시궁창쥐들도 아르마의 전략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기껏 배운 기술을 써먹을 수 없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이게 훨씬 먹고살기 편한 것 같아.”

조촐한 식사를 마친 다음 루디가 하천가에서 수세미로 쓰레기통을 닦으며 말했다. 물론 그가 배운 기술이란 나이프맨에게 배운 소매치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르마는 조잡하게 만든 어망에 물고기가 걸렸는지 확인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이프맨이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 안 나? 괜히 치안관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거 없어.”

“하긴…… 요즘은 시궁창쥐가 번화가에 나오기만 해도 잡아간다더라. 3번 다리 오른쪽에 사는 욥튼이 닷새 전에 끌려갔는데 소식이 없어.”

상점가 뒤쪽의 하천엔 모두 열여섯 개의 다리가 있는데, 아르마 일행의 아지트는 그중에 아홉 번째 다리의 왼편이었다. 그렇게 좌우를 합쳐 서른두 개의 다리 밑마다 버려진 아이들이 대여섯 명씩 모여 그룹을 이뤄 살고 있었다.

루디의 말에 아르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들었어. 그런데 그 망할 사이클롭스 녀석들은 자꾸 도둑질이나 하고……. 이러다가 대대적인 단속이라도 뜨면 괜히 우리까지 덤터기 쓸 텐데 말이야.”

사이클롭스 패거리가 도둑질이나 소매치기를 하고 있다는 건 시궁창쥐 사이에선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특히 대장인 사이클롭스 본인은 도둑질이 아니라 강도짓까지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

사이클롭스는 열다섯 살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덩치가 컸다. 더구나 웬만한 어른은 주먹으로 때려눕힐 정도로 힘도 강했다.

녀석은 훔친 술을 마시고 취하면 자신이 치안관도 쓰러뜨릴 수 있다며 호기롭게 주정을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르마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치안관들 중에 지위가 높아 보이는 몇 명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고, 무시무시한 힘으로 무기를 휘둘렀다.

그들은 뭔가 특별한 힘을 다룰 수 있는 것 같았다.

아르마는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강한 힘을 낼 수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시궁창쥐들 중에 그 답을 알고 있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빠도, 엄마도 엄청 강했었는데…….’

아르마는 문득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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