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그레트 1화



프롤로그



노인의 나이 92세.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수명은 다 누려보았다고 여겨질 법한 연령이었다.

노인은 정령술사였다. 세간에 알려지기를 자연의 4속성을 전부 다스리는 위대한 ‘대현자 이그레트’.

어디서 태어났는지, 또 어디서 사는지도 알려지지 않고 바람같이 살아온 삶이었다.

노인이 된 이그레트는 여전히 방랑자였다. 범인과 다른 특별한 힘은 그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채워주지 못하였다.

그는 날 때부터 천애고아였고, 나이를 먹어서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홀로 늙었다.

한평생 자연의 정령을 벗 삼고 가족 삼으며 그렇게 살아왔다. 인생의 초기부터 혼자였기에 후회는 없었다.

정령은 티 없이 맑고 순수한 존재들이었으며, 그들과의 소통만으로도 충분히 적적함을 달랠 수 있었다. 만사가 편안하고 매사에 능통했다.

그저 물 흐르듯 세월에 몸을 맡긴 채 한들한들 한량으로 지낼 뿐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이 되자,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온 것인가?’

이그레트의 마지막을 직감한 정령들이 반투명체로 몰려들어 그의 곁을 지켰다.

파도처럼 주변을 가득 메운 정령들은 인간의 언어와는 다른 소리로 위로와 인사를 건네주었다.

-괜찮아, 이그레트.

-너는 최고로 깨끗한 인간이었어. 우리가 본 중에서 최고였다구!

-100년 가까이 선하고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을 순 없어. 이그레트는 정말 인간이 아닌 것 같아.

쭈글쭈글 늙은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매달렸다.

“허허. 아이들아. 나도 곧 눈을 감는단다.”

이그레트는 작은 형태를 띤 정령들을 ‘아이’라고 불렀다. 실제로는 감히 인간의 수명으로 따라잡지도 못할 세월을 존재해 온 자연체들이지만, 이그레트는 마냥 그들을 귀엽고 다정하게 여겼다.

외형이 엄지손가락만 한 어린아이 같기도 했지만, 정령들의 사고방식이나 말투가 꼭 그런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한평생을 같은 모습으로 이그레트의 곁을 지켜준 정령들에게 표현하는 그 나름의 애칭이기도 하였다.

-이그레트, 슬픈 거야?

-울어? 이그레트.

눈물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정령들은 그의 감정을 재빠르게 눈치채고 걱정하고 있었다.

이그레트는 힘이 없어 자꾸만 축축 쳐지는 손가락을 들어 눈앞에 파닥거리는 정령을 쓸어주었다.

그마저도 잘되지 않아 덜덜 떨렸지만, 정령의 머리에 제대로 닿은 검지가 천천히 이를 어루만졌다.

“글쎄다…… 허허. 쿨럭쿨럭.”

슬픈 것인지 모를 눈먼 감정이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메웠다.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고 아쉬웠다.

이그레트는 역사에 길이 남을 ‘대현자’로서의 삶을 살았고, 그만큼의 업적을 쌓았으며, 남들이 꿈꾸지 못할 부와 명예를 누리면서 살아왔다. 그에게 부족했던 것이라면 아주 단순한 것뿐이었다.

‘가족, 친구.’

어떻게 보면 그는 같은 종족 사이에서 어울리지 못한 외톨이였다. 타고난 힘이 강력했지만,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

그의 힘을 탐내 미끼를 놓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작 그와 진심으로 친우가 되고자 하는 자는 없었다. 있었더라도, 결국 그를 이용하는 쪽으로 변질되어 갔다.

그가 만나온 인간이란 그런 존재였다. 너무 뛰어난 능력이라는 건, 마치 인간관계를 좀먹는 족쇄와도 같았다.

그래도 이그레트는 포기하지 않고 인간답게 살기를 염원해 왔다.

배신당하고, 일어서고를 몇 번이나 반복하여 찔린 상처가 너덜너덜해지고 눈물자국이 딱딱하게 마를 때 즈음이 되어서야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탐내선 안 될 것을 탐내고 있었다는 것을.

인생이란 공평해서 얻는 게 있으면 얻지 못하는 게 있는 법이라는걸.

반평생을 넘게 배신의 굴레에서 얼룩진 그는 그렇게 자신의 운명을 자책하며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이 찾아오고 나서야 다시금 생각의 전환이 일어났다.

“내가…… 어리석었구나.”

-무슨 소리야, 이그레트.

-당신만큼 현명한 인간은 없어.

-현명한 이그레트. 사랑스러운 이그레트.

정령은 대체로 인간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정령과 계약하고 정령술을 익히는 술사들은 몹시 보기 드물었다.

그중에서도 정령으로부터 ‘사랑’받는 정령술사는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대현자 이그레트.

정령의 사랑을 받는 4속성의 정령술사 이그레트.

본가도, 이을 성도 없이 이름 넉 자뿐인 평민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강대하고 고귀한 자리에 있던 사내.

정령들은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고 아꼈다. 그 진심을 느낀 이그레트는 고마움에 울컥 치솟은 눈물을 마른 웃음으로 대신 내보냈다.

“포기하지 말아볼 걸 그랬다.”

-무엇을?

“쿨럭쿨럭!”

기침과 함께 몸이 들썩였다. 온몸이 나무토막같이 뻣뻣하게 느껴졌다.

이그레트는 흐릿한 시야를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가쁜 숨이 실낱처럼 가늘게 흘러나왔다.

‘사람들과 사는 것.’

귓가가 물속에 들어간 것처럼 웅웅거렸다. 그래도 정신과 이어진 정령들이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그레트!

-우릴 잊지 마, 이그레트.

-편안히 잠들어야 해.

-그리고 일어나면…….

‘인간을 믿어보는 것.’

왜 후회는 늘 늦는 것일까. 어째서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부질없는 용기와 미련이 남는 것일까.

이그레트는 몸서리치게 갑갑함을 느꼈다. 몸은 늙어 죽어갔지만, 젊은 시절 불태우던 패기와 열정이 아직 마음속에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만약 다시 살게 된다면, 다신 그리 겁쟁이처럼 달아나지 않으리.

점멸하는 의식 속에서, 소중한 이들의 속삭임이 마지막으로 울려 퍼졌다.

-언제나 네 곁에 있을게.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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