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천회귀록 001화



“네놈을 보면 심장이 뛰었지. 언제나. 처음 만난 것처럼.”


세상의 마지막 절벽 끄트머리에 선 사내가 무미한 어조로 말했다.

마황의 길고 가느다란 7개의 눈동자가 그를 감싸 내렸다.

톱니 조각 같은 입술이 깎아내리듯 굴렀다.


『우둔하게 멸한 자여.』

“그래.”

『어찌하여 내게서 도피하지 않는가.』

“피하지 못할 것을 알기에 피하지 않는다.”

『강해져 돌아와라. 이다음에는 나를 멸할 수 있도록.』

“그래.”


사내는 강고하게 선언했다.


“다음 삶에서야말로 나는 너를 죽인다.”

『기대하지.』


세상과 함께, 사내의 심장이 찢겼다.


***


대장장이의 공방.

너무나 낡고 초라해 그 누구도 쓰지 않는 장소.

한 남자가 참나무통 위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두근……두근…….


과거로 돌아왔음을 깨닫게 해주는 것은 언제나 심장의 고동 소리였다.

강윤수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오른손에는 윤기 어린 칼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손목에 찬 단말기를 바라보았다.

오늘 날짜와 장비품의 설명문이 표기되어 있었다.


TODAY:468-P-3(REORKAN)

「광휘의 장도」

등급-일반

절삭력: 8

휘두를 때 낮은 확률로 섬광이 터져 나온다.


레오르칸 제국력 468년 불새의 달 3일.

지구의 사람들이 갑작스레 낯선 세계로 이전된 날.

20년 전으로 돌아온 것이다.

또다시.


강윤수는 장도의 흐드러진 칼날을 바라보았다.

장도를 가볍게 휘둘렀다.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울렸다.


부웅-


불현듯 첫 번째 삶이 떠올랐다.


그는 대장장이였다.

언제나 가까스로 살아남아 처량하게 살아갔다. 가난한 생산직 클래스는 천대받고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그는 번번이 클래스 선택을 후회했다. 판데모니엄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수리 병사로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마황과 조우했다.

세상을 파멸시키려 드는 절대적 존재.

그는 마황에게 걸려 죽임을 당했다.


두 번째 삶도 떠올랐다.

눈을 떠보니 낡은 공방이었다. 그는 자신이 회귀했음을 깨달았다. 그 후 전생의 고달팠던 인생이 멋지게 뒤바뀌었다.

좋은 장비를 꾸리고 동료를 포섭해 그는 강인한 용병단을 창설했다. 용병 클래스는 위험천만한 전투가 주를 이뤘지만, 대장장이 삶보다야 훨씬 나았다.

20년 후 판데모니엄과의 전쟁이 일어났고 그의 용병단은 최전방에서 맹렬히 싸웠다.

그리고 마황에게 걸려 죽임을 당했다.


곧이어 세 번째 삶이 기억났다.

회귀하고서 강윤수는 실수를 되새겼다. 나중에 자신을 방해할 요인은 초반에 미리 제거했고, 전생의 지식을 이용해 스킬과 레벨을 폭풍처럼 올렸다.

클래스 선택도 신중을 기해, 마침내 강화사로 전직했다. 칼과 갑주를 최상급으로 강화하고 나자 자신과 대적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단 한 명. 마황만 빼고.


네 번째 삶. 검만 바라보며 살았다.

세 번이나 마황에게 죽자 그는 독기가 차올랐다.

그는 오로지 칼 한 자루만 가지고 고독한 수행에 들어갔다. 강윤수는 위험한 사냥터와 유적을 단신으로 맴돌았다.

고된 수련이 끝나자 검술은 최상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그에게 죽은 초대형 몬스터만 서른이 넘어갔다.

마침내 그는 만 명에 한 명 나올까한다는 불세출의 검사 클래스로 전직을 마쳤다.

황제는 자신을 제1기사단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기사단장으로서 판데모니엄과의 전쟁을 능수능란하게 지휘했다.

그러나 마황만은 모든 전략과 군세가 소용없었다. 그는 마황에게 걸려 죽임을 당했다.


다섯 번째 삶은 혹독했다.

이젠 회귀도 익숙해졌다.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애초에 세상이 멸망하든, 말든 신경을 끄기로 했다.

최대한 조용히 살았다. 다른 자들에게 눈에 띄지 않으려 했고,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만 수입을 얻었다.

선택한 클래스는 러너.

흔하고 평범한 계열이었다. 판데모니엄과의 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그는 의무 참전하지 않고 탈영해 외딴 섬으로 도주했다.

하지만 마황은 자신을 찾아왔다. 또 마황에게 걸려 죽임을 당했다.


여섯 번째 삶부터 두려움을 느꼈다.

회귀하자마자 곧바로 마나 수련에 돌입했다. 그는 마법 주문을 암기하고 마나의 흐름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노력한 끝에 소서러 클래스로 전직했다. 그는 은신 및 잠입 계열 마법에 남은 시간을 모두 투자했다.

판데모니엄과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온 힘을 다해 세상의 끄트머리에 숨기 위해 알고 있는 모든 마법을 동원했다.

하지만 마황은 기어코 자신을 찾아냈다. 그렇게 마황에게 걸려 죽임을 당했다.


일곱 번째 삶. 전투만이 전부가 아니다.

악착같이 화술을 수련했다. 남들보다 더 능숙히 말하고, 논리적인 말재주를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유능한 달변가 밑에서 10년 넘게 훈련을 거듭한 끝에 그는 협상가 클래스로 전직을 마쳤다.

그는 황제를 설득해 제국이 판데모니엄에 투항하게 만들었다.

희생양이 된 시민이 떼거리로 죽었고, 대륙은 피로 물들었다. 그 대가로 황궁만은 무사했다.

하지만 마황은 그의 굴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마황에게 걸려 죽임을 당했다.


그 후는 기억이 희미했다. 여덟아홉 번째 삶에서 겪은 절망감이 워낙 심했던 탓이다.


열 번째 삶.

이때 자신은 반쯤 미쳐 있었다. 회귀하자마자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다.

극한까지 쌓인 울분을 살인으로 해소했다. 전생의 지식, 화술, 검술, 마법, 전략, 강화제련의 비기를 모두 통달한 자신이 학살자가 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어느덧 그는 대륙 최고의 학살자가 되었다. 3,000명째 살인을 마치자, 히든 클래스인 생명포식자로 전직할 기회가 생겼다.

정점까지 단련된 암살과 단검술을 이겨낼 사람은 대륙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되고 마황이 나타났다. 그는 엎드린 채 덜덜 떨었다.

세상을 파괴하지 말라고. 인생을 반복하게 하지 말라고 비굴하게 구걸했다. 하지만 마황은 듣지 않았다.

계속 그래 왔듯이 그는 마황에게 걸려 죽임을 당했다.


그 후론 마황을 만날 때마다 물어보았다. 왜 자신을 죽여 과거로 되돌리는 것이냐고.

문답무용이었던 마황이 대답해준 것은 98번째 삶에서였다.


『회귀를 거듭해라. 나의 적수가 되어 여흥이 되어라.』


마황은 자신에게 맞설 상대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강대한 자신은 마계에서조차 그 상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 사람을 골라 인생을 끝없이 반복하게 만들었다.

그 사람이 바로 강윤수였다.


『삶을 되풀이할수록 누구나 견고해지니까.』


강윤수는 깨달았다. 자신은 마황의 심심풀이이자 장난감에 불과했다.

이 반복을 벗어나는 방법은 마황을 죽이는 것뿐이었고, 그걸 행하는 것은 천지를 부숴 버리는 것보다 어려웠다.

설명을 마친 뒤, 마황은 그를 죽였다.


214번째 삶.

고된 노력 끝에 그랜드마스터 인형사가 됐다. 그는 인형사 최대의 금기를 범했다.

자신의 육신을 최상 최악의 전투 인형으로 개조했다.

차가운 심장에는 마르지 않는 영혼이 흘렀고, 가장 연약한 눈동자조차 위험한 장병기로 가득했다.

죽을 법한 상처를 입더라도 곧바로 자가 수리가 가능했다.

하지만 마황에게 걸려 먼지가 되어버렸다.


273번째 삶.

숨겨진 로그 마스터의 전당에 침입해 갖가지 함정을 통과하고 대도로 전직했다.

자물쇠 따기, 맹독, 암습, 은신 등 도둑의 기본적 소양은 모두 마스터했다.

그는 멸망룡의 둥지에서 무한의 술잔, 각혈의 마검, 파멸의 옥새를 훔쳐냈다.

훔치지 못할 것은 저 하늘의 태양과 달, 별뿐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마황의 목숨 역시 훔쳐내지 못했다.


347번째 삶.

몬스터 측과 친우를 맺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고, 난폭한 성미를 가진 그들이었다.

그러나 이종족 언어, 전술, 전략, 웅변술을 완벽히 마스터한 자신은 그들의 성공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몬스터들의 군주, 몬스터로드가 되어 대륙을 평정했다.

그러나 마황에게 걸려 평정당했다.


454번째 삶.

최후의 네크로맨서로 시작해 마침내 불사의 리치로 현신했다.

살결은 썩어문드러지고 새하얀 뼈만이 남았다. 모든 생명을 희롱하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불사의 존재 리치.

네버데드 드래곤, 데스 제네럴 같은 최상급 언데드도 간단히 부릴 수 있었다.

그는 불멸의 군단을 일으켜 판데모니엄과 전면전을 벌였다.

어김없이 마황이 나타났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초월적인 존재의 생명력을 흡수했다.

하지만 리치일지라도 마황의 생명력은 너무나 강대했다.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전신이 폭발하고 말았다.


522번째 삶.

모든 비약과 정수의 제조법을 암기했다.

연금술 클랜 최고 지부장에 오르게 된 그는 대연금술사로 전직을 했다.

갖은 약물을 가리지 않고 섭취해 몸을 한계까지 각성시켰고, 용암 골렘과 사제 폭탄을 합성해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다.

마황이 등장하고서 판도는 또다시 바뀌었다. 그는 석화 포션을 섭취해 누구도 부술 수 없는 조각상으로 변한 직후였으나, 마황의 손아귀에 산산조각이 났다.


592번째 삶.

마황에게 이길 수 없음을 인정했다.

온갖 고대 서적을 뒤지고 유적을 탐사해 볼지라도, 그 어떤 스킬과 클래스를 택한다 할지라도 판데모니엄은 무너뜨릴 수 없었다.

마황을 죽이는 것과는 별개로 현실로 돌아갈 방법을 연구하기로 했다. 학자 클래스로 전직하자 탐독할 수 있는 지식이 배로 늘어났다.

그 와중에 전쟁은 벌어졌고, 마황에게 걸려 죽임을 당했다.


689번째 삶.

1,000년이 넘는 연구 끝에 현실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냈다.

그 성과로 학자의 최종 클래스, 세계를 잇는 현자로 전직하는 쾌거도 이뤘다.

차원을 허물고 강윤수는 마침내 그리웠던 서울로 귀환했다. 그리고 광화문 광장에서 마황에게 걸려 죽임을 당했다.


719번째 삶.

황실 제독으로서 거대한 범선을 제작해 이기리스 해협 밖으로 나아갔다.

긴 항해 끝에 동쪽에서 신대륙을 발견했다. 밥을 지어먹고, 무예를 중시하며 동양적 풍미가 느껴지는 대륙이었다.

신대륙 발견 공적을 인정받아 모험가의 최상위 클래스, 미지의 탐험가로 전직을 이뤘다.

계속 이곳에 있고 싶었지만 판데모니엄과의 전쟁까지 불과 사흘이 남은 상태였다.

친해진 협객이 숨겨 주었지만. 신대륙까지 날아온 마황에게 걸려 죽임을 당했다.


742번째 삶.

마황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날려도 도발 효과가 없단 것을 깨달았다.

마황은 어떤 감정도 비추지 않은 채 그와 세상을 가볍게 내찢었다.


872번째 삶.

감정이 메말라갔다. 그는 말이 없어졌고, 성격은 차갑고 건조해졌다.

웃는 아이를 보아도 기분 좋지 않았고, 살인에 관한 거부감도 없어졌다. 마황에게 걸려 죽임을 당하는 순간에도 별 감흥이 느껴지질 않았다.


915번째 삶.

18,00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 왔다. 히든 클래스 전직과 비기 획득도 지겨웠다. 모든 것에 지쳐 갔다. 마황에게 죽임을 당하는 순간조차도.


990번째 삶.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을 잃어버렸다. 강윤수는 그저 지독한 허무함만을 지닌 채 죽음을 기다렸다.

자신 외의 사람들은 모두 죽고, 세상은 파멸로 이끌어졌다.

마황의 위압적인 힘에 육신이 썰어졌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그는 최후의 공격을 감행했다.

당연히 먹히지 않았을 일격이었고, 그리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강윤수는 분명히 목격했다.

격하게 일그러진 마황의 표정을.

금세 마황은 본래의 태연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실제로 별다른 상흔을 입지도 않았다.

그러나 죽기 직전, 강윤수는 차갑게 실소했다.


“찾았다.”


콰직-!


휘두른 장도 끄트머리에 덧창이 부딪쳐 박살 났다.

강윤수는 건조한 눈빛을 띄운 채 일어났다.

차갑게 식은 용광로 옆 벽면에다가 그는 칼날을 살며시 그었다.


사각……사각……사각…….


작은 正자가 199개나 그려졌다. 그리고 마지막 正은 4획에서 끝났다.

바로 오늘, 강윤수는 999번 회귀했다.

일천 번째 삶이 시작되었다.

1화
9.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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