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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방은 빛을 향해 뛰어든다. 날갯짓의 끝은 늘 같다. 밝지만 뜨거운 불에 날개 끝부터 타들어가는, 자멸이다. 위험한 만큼 아름다운 불빛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불빛은 아름다운 만큼 잔인하고, 나방은 잔인의 밑바닥을 바라보며 날갯짓에 박차를 가한다. ‘황후의 남자’ 속 등장인물들은 그러한 관계에 놓여 있다.

    ‘황후의 남자’는 진부한 소재에서 시작한다. 호위무사와 태자를 양 옆에 둔 삼각관계, 여자에 눈이 멀어 조강지처를 내친 황제와 권력을 위해 자식을 꼭두각시로 내세운 황후, 그리고 시종일관 현화를 꽃에 비유하는 것 등이 그러하다. 특별히 눈에 띄는 캐릭터가 없는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은 연정이 아닌 본인의 욕심과 안위를 위해 모든 일을 거행한 위소진이다. 소진은 여인의 삶을 버리고 태자의 마음도 원하지 않으니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다. 후에 현화를 향해 가지게 된 투기도 시윤을 향한 연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자신의 응당 가져야 할 것을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심과 자존심의 충돌인 점이 마음에 든다. 연정에 얽매이지 않는 인물로 끝까지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현화의 사랑에는 큰 흥미가 동하지 않는다. 진부한 소재에서 비롯된 사랑이기에. 다만 흥미가 가는 것은 황족과 귀족들 간의 정치싸움이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정치적 입장과 사적 입장 사이의 완급조절을 효과적으로 진행한다. 같은 사람에게도 배후의 힘이 미치느냐 아니냐에 따라 태도를 달리하는 귀족들, 뼈 있는 말을 통한 힘겨루기는 자칫 복잡해질 수 있는 정치싸움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특히 인물들 간의 묘한 동족혐오는 독자의 흥미를 끄는 또 다른 지점이다. 핵심인물들은 서로 혐오하면서 닮아 있는 관계에 놓여 있다. 시윤과 민진홍이 그러하고 민진홍과 위소진, 그리고 민진홍과 정환이 그러하다. 시윤과 민진홍은 남의 것을 탐내고 쉽게 화를 내며, 그 화는 자신의 나약함과 불안함을 부인하고 싶어서 내는 화라는 것에서 같은 노선을 취한다.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태생이 천한 둘은 기반이 없기에 더욱 거센 발버둥을 칠 수밖에 없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꼭 닮았다.

    신국을 예전처럼 세우고 싶어 하는 소진 또한 민진홍과 같은 목적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예전의 강성하던 신국의 모습을 되찾으려면 먼저 신국을 손에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소진은 능력 밖의 일도 무리하게 감행하는 민진홍과는 달리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일을 행한다.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취하려는 민진홍과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기에 오히려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는 소진의 태생적 차이가 엿보인다.

    정환은 신국의 속국에 놓여 있는 부주와 현화를 구해야 하는 앞으로의 일 때문에 당장 현화 마음을 돌아보지 못하는데, 이는 ‘대업을 위해 멀리 보아야 한다’는 것을 시윤에게 끊임없이 강조했던 민황후의 가치관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동족혐오의 끝은 자멸이다.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는 상대를 향해 쏟아내던 멸시가, 결국 거울을 보며 되뇌는 것과 같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멸시는 자신에게 돌아온다. 등장인물들이 이를 어떻게 감내할 것인지는 앞으로 기대되는 부분이다. 개인적인 감상으로, 시윤이 더 잔인해졌으면 좋겠다. 멀리 보라던 민진홍과는 달리 가까이 있는 것들을 돌아보고자 했던 자신이, 가장 근본적인 본인 스스로에 대한 자멸감으로 인해 어디까지 치닫게 되는지, 그리고 치달은 밑바닥에서 무엇을 건지게 되는지 궁금하다.

    아름다운 불빛에서 멀어지지 못해 날게 끝부터 타들어가게 되는 현화의, 개인의 안위보다 공주로서 본분을 생각하게 된 '성장'은 과연 성장일까. 미리 정해진 공주의 틀 안에 자신을 우겨넣는 과정은 성장일까 고통일까. 지금보다 더한 고통을 느껴야 할 현화가 본인의 감정조차 추스르지 못해 정환과 시윤 둘 다에게 상처를 입히는 과정이 못내 못마땅하다. 그럴 만한 환경에서 자랐음을 알면서도 현화의 우유부단함은 쉬이 납득가지 않은 부분이 많다.

    마지막으로, 정환은 현화를 진정 사랑한 것일까. 개인적으로 정환은 '자신이 사랑하는 현화의 모습을 사랑'한 게 아닐까 한다. 현화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고 가까이 하기 원하는 현화의 모습을 사랑한 것이다. 자신의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감내하면서까지 무언가를 해 보려 하는 현화의 모습은 정환이 사랑하는 모습이 아니다. 정환이 규정해 놓은 현화는 응당 자신의 품 안에서 고요히 웃음만 지으며 행복해하는 것이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주는 게 도와주는 거라며 현화를 눌러 앉히는 부분에서, 정환과 현화는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현화의 연정이 그저 정에 불과했음은 이미 초반부 정환의 성급한 고백 장면에서부터 짐작 갔던 일이다.

    타들어가는 나방과 그러한 나방을 감싸 안는 불빛.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자칫 클리셰에 잠식되지 않도록 나방과 불빛간의 관계를 잘 조절했으면 하는 기대가 있다.

    바쁜 라이언 | 88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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