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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Zero ground. 아무것도 없는 땅. 소설 ‘제로 그라운드’는 무(無)에서 시작한다. 게이트를 통해 끊임없이 등장하는 변이체들을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계획은 핵 투척이었고, 주인공 대성과 시화는 찰나의 순간 모든 것을 잃고 만다. 바닥부터 시작하는 삶, 두 소년은 새로움 앞에서 익숙함을 찾고, 익숙함 앞에서 돌연 낯섦을 발견하기도 하며 점점 성장해 나간다.

    소설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꼼꼼한 설정과 속도감 있는 전개, 그리고 생생한 전투 장면 묘사이다. DNA 마지막 열의 재배치를 통한 에너지 발현이라는 창의적인 소재에서 출발하여, 편중속성, 극단의 속성끼리 충돌이 공격으로 작용한다는 설정 등 포스의 세세한 특성까지 기획한 점이 눈에 띈다. 소재의 다양한 특성을 세밀하게 설정한 것은 글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에 효과적으로 기여한다. 뿐만 아니라 피의 호수에 피라냐를 불러내는 기술 등 시각적으로 참신한 기술을 더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생생함을 더한다. 다만 전개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지나친 한문어의 남용과 평범한 문장에도 과학적 용어를 사용하는 습관이다. 전송, 향연, 환원 등 한문어의 사용은 디스토피아 특유의 무미건조한 분위기 형성에 일조하지만 평범하게 처리해야 할 문장도 어색하게 만들어 독자의 흐름을 방해한다. 여기에 소설의 배경은 2040년대임에도 2010년대에 입각한 시대고증이 사소한 걸림돌로 작용한다.

    전반적인 소설의 흐름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는 바로 인간의 사회성이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동물적 세계로 변모한 2043년에,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특성은 상식과 비상식 사이에 균형을 이루며 등장인물들로부터 모순과 발버둥을 이끌어 낸다. 극중 태민은 죽일 때의 쾌감으로 무뎌지는 인격에 경각심을 느끼며 도덕적 사고방식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한다. 정상적인 ‘인간’들끼리 모여 사는 사회에서는 도덕이라는 추상적 관념이 의미를 갖지만, 대성과 시화, 그리고 태민이 살아남아야 하는 피폭구역은 철저한 무도덕의 구역이다.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변이체들 사이에서 인간은 똑같은 짐승이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태민이 대성에게 “신념을 지키려면 먼저 강해져라”라고 조언한 대목에서도 강조되었듯이,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정신적 가치가 우위에 설 수 없다. 상식적으로는 피폭 구역에서 인간들 역시 변이체들과 다름없이 본인의 목숨을 중요시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옳다. 자신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어주었다고 남은 무기를 모두 내어준 준태와 같은 인물처럼, 위험한 순간에도 발휘되는 인간의 사회성과 이타심은 객관적으로는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당사자는 행복하다. 준태는 후회하지 않았으며, 이를 바라보는 주인공 셋 역시 이를 납득했다. 상식과 비상식의 모순 사이에 인간이 여전히 현존할 수 있는 이유는 본능을 일깨우는 핍박 속에서도 거역의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본능보다 신념을 내세울 수 있고, 본능을 따르지 않음에도 행복할 수 있음은 변이체들이 난무하는 소설 가운데서 작가가 인간과 변이체의 차이로 또렷이 내세우는 지점이다.

    본능과 이성 사이 모순에서 출발하는 소설 속 대성은 개중 가장 모순을 떠안은 인물이다. 대성은 살기 위해 검을 들었지만 동시에 붕괴의 가능성을 지닌 인물이다. 아직 미성숙한 만큼 목숨이 촉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일행이 자신을 살인자로 볼 거라는, 목숨과 아무 상관없는 사회적 시선 때문에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한 번 피를 묻히기 시작하면 광적으로 흥분하는 면을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소설의 주제를 가장 잘 대변하는 대성을 성장과 제어의 모순 속에서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대성의 내, 외적 갈등은 아직 상당 부분 나이에 따른 미성숙함에 기인하고 있는데, 앞으로의 전개 속에서 대성이 어느 방향으로 성장한 모습을 보일지 기대된다.

    바쁜 라이언 | 88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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